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 (문단 편집) == 원인 및 책임 소지 == 흔히 [[극우]]를 중심으로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의 대통령이 전두환이 아니라 [[최규하]]라는 이유로 전두환과 하나회가 아닌 [[최규하]] 대통령에게로 책임을 돌리곤 하는데, 이는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등으로 [[하나회]]와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힘을 얻었음을 간과했거나, 일부러 무시하는 주장이다. 광주 학살의 1차 책임은 계엄군이 아닌 최종 결정권자이자 명령권자인 '''[[전두환]]과 [[하나회|군정]]에게 있다.''' 계엄군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시민 학살을 지시한 [[전두환|장본인]]이 범한 죄를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 [[http://db.kdemocracy.or.kr/isad/view/00714189|당시 지휘계통]]상 책임자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 겸직), 진종채 제2군사령관, 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 그리고 예하 부대 지휘관들로 되어 있으나, SBS가 2018년 보도한 [[http://v.media.daum.net/v/20180514210314266|미 국무부 비밀전문]]에 따르면 '''최종 진압작전을 결심한 책임자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다.[* 이 보도가 있기 전까지, [[1989년]] 국회 5·18 특위 청문회, [[1995년]] 검찰 수사, 그리고 [[2007년]] 국방부 진상조사위원회 조사 등 세 차례 조사에서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5·18 진압과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었다. 해외 언론의 보도 등 정황과 증거상 전두환이 5·18에 연루되었다는 추측만 있었다. [[https://1boon.kakao.com/issue/518firingorder|해당 내용]]. 국내의 5·18 관련 기록들 중 상당수가 증거인멸로 사라지거나 왜곡된 것이 많은데, 미국의 외교전문은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문부식(시인)|문부식]] 등 [[자유주의]]자들은 해당 만행을 '[[국가주의]]'라는 반 이성적 광기에서 기인했다고도 [[http://cafe.daum.net/siminyoo/6VMe/10185?q=%EB%AC%B8%EB%B6%80%EC%8B%9D%20%ED%83%9C%EA%B7%B9%EA%B8%B0%20%EC%82%BC%EB%AF%BC%ED%88%AC|해석했다.]][* 해당 게시글 원본은 2002년 문부식 저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에 수록됐다.] 신군부 역시 국가 권력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국가'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외출.외박 없이 겨울부터 시작된 「충정훈련」에 대한 부대원의 반발이 과잉진압을 불렀습니다. 특히 「철없는 대학생들 때문에 우리만 고생한다」는 분위기가 퍼져나갔지요.』 >『영외거주자인 고참 하사관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 불만이 밑으로 전달됐습니다. 나가면 데모하는 대학생놈들 가만두지 않겠다는 적개심밖에 없었습니다.』〈趙씨〉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광주에 갔었다는 이유로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鄭씨〉 >---- >-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3186763|<광주로 간 군인들> 4.충정훈련과 과잉진압]]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대원들과 31사단 부대원들, 항공작전사령부 헬기 조종사와 무장 운용사수들, 20사단(현 11사단 예하 결전여단) 출신 [[예비역]] 장병들에게도 당시 사건은 지우고 싶은 암울한 기억이다. 이들은 그 당시 시대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상부에게서 빨갱이를 때려잡으러 간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이를 수행하였으며, 진압 당시 학생과 시민들을 진압하다 점점 폭력 수위가 올라 같은 나라 국민을 상대로 총구를 겨누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을 다수 겪었다. 진압 작전에 참가한 계엄군들은 "[[시민|빨갱이]]에게서 나라를 지켰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지만, 이윽고 진실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이는 국민을 무차별로 살해한 학살자라는 불명예로 돌아왔다. 실제로 당시 계엄군의 상당수는 [[PTSD|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등 다양한 정신 문제를 겪고 심지어 죄책감과 괴로움에 밖으로조차 쉽사리 나서지 못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괴로운 노후를 보내는 이들, 심지어는 한때 5.18 진압작전에 참가한 이들의 지인들의 증언에는 옳지 못한 전두환의 폭동적 무력 군사진압 명령을 따른 것 하나로 온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결국 젊은 나이에 쓸쓸히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안타까운 이들도 상당히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결국 계엄군과 시민 양측 모두에게 심각한 상처로만 남은 사건인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